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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요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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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운요호 사건은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가 조선의 강화도에 접근하여 발생한 무력 충돌 사건이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조선의 개항을 압박하기 위해 군함을 파견했고, 운요호는 식수 획득을 핑계로 강화도 초지진에 접근했다. 조선군은 이에 포격으로 대응했고, 운요호는 반격하여 초지진과 영종진을 공격, 육전대를 상륙시켜 살인, 방화, 약탈을 자행했다. 이 사건으로 조선은 35명의 사망자와 16명의 포로, 다수의 무기 약탈 등의 피해를 입었고, 일본은 무력 시위를 통해 개항을 요구했다. 이후 일본은 구로다 기요타카를 특명 전권 대사로 파견,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한반도 개항을 이끌어냈다. 이 사건은 조선의 개국과 서구 열강과의 관계 변화, 그리고 임오군란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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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요호 사건
위치 정보
기본 정보
충돌강화도 사건
''운요''의 병사들이 [[영종진]] 성을 공격하는 모습 (1876년 목판화).
일본 해병대가 운요에서 강화도 근처의 영종도에 상륙하는 모습
날짜1875년 9월 20일
장소강화도, 조선 (현재 대한민국 강화도)
결과일본의 승리, 강화도 조약 체결
교전 세력
교전국 1일본 제국
교전국 2조선
지휘관
지휘관 1이노우에 요시카
지휘관 2이민덕
전력
전력 1육상:
22명의 해군 및 해병대
해상:
군함 1척
전력 2육상:
500명 보병
포병대
사상자
사상자 1사망 1명
부상 1명
사상자 2사망 35명
포로 16명
대포 및 소형 대포 36문 노획
요새 1개 파괴
명칭 (언어별)
한국어운요호 사건
일본어강화도 사건
영어Un'yō incident, Ganghwa Island incident
추가 정보
관련 조약일조수호조규 체결

2. 배경

메이지 유신(1868년) 이후 일본은 중앙집권화와 근대화를 추진하며 대외적으로 정한론을 내세워 부국강병을 추구했다.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으로 인해 서구 열강의 통상 요구를 거부하고 있었다. 1873년 11월,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조선의 대외 정책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열렸다. 일본은 이 기회를 틈타 조선을 개항시키고자 했다.

19세기 후반, 한국은 러시아 제국, 프랑스 식민 제국, 청나라, 일본 제국 등 여러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특히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했다. 일본은 조선에 사신을 보내 새 정부 수립을 알리고 근대적인 외교 관계를 맺고자 했으나, 조선은 일본의 칙서에 사용된 '皇'(황)과 '勅'(칙)이라는 글자가 중국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며 수령을 거부했다.[1] 이는 일본 천황이 청나라 황제와 동등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조선의 일본 국서 거부 사건을 빌미로 조선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여러 차례 국서를 보냈지만 조선이 계속 거부하자, 일본 내부에서는 조선 외교를 외무성으로 일원화하고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조선을 개항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870년에는 사다 하쿠보가 "30개 대대를 가지고 조선을 공격해야 한다"는 정한론 건백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1871년, 일본은 청나라와 일청수호조규를 체결하여 청나라와의 관계를 개선했지만, 같은 해 신미양요가 발생하면서 조선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조선은 신미양요를 통해 척화 의지를 더욱 굳건히 했고, 일본에 대한 의심도 커졌다.

1872년에는 외무성 관리 사라 마사키가 협상 진전을 위해 왜관란출 사건을 일으켰고, 일본은 초량왜관을 대일본공관으로 개명하고 외무성 직할로 두었다. 그러나 이는 조선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오히려 외교적 긴장을 고조시켰다.

1873년, 일본은 히로쓰 히로노부의 보고를 근거로 조선 파병을 결정하고, 정한론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10][11][12][13][14]

2. 1. 일본의 정세

일본은 메이지 유신(1868년)을 통해 중앙집권화와 근대화를 추진하고, 침략전쟁을 통해 부국강병을 추구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이웃나라 조선이 통상 수교를 거부하던 흥선 대원군이 권력에서 물러난(1873년 11월) 것을 기회로 조선 개항을 시도했다. 이전부터 조선이 문호개방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일본은 무력시위를 위해 군함 5척을 조선 연해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1]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에서는 265년간 지속된 도쿠가와 막부가 막을 내렸다. 새로운 일본 정부는 1868년 12월 19일, 새 정부 수립을 알리는 칙서를 조선에 보냈으나, 조선은 칙서에 사용된 '皇'(황제)과 '勅'(칙령)이라는 한자청나라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이유로 수령을 거부했다.[1] 이는 일본 천황이 청나라 황제와 동등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1]

청나라는 당시 일본 제국의 힘을 알고 조선에게 일본의 칙서를 받으라고 제안했다.[1] 그러나 1875년 부산에서 열린 협상에서도 조선이 일본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아 긴장이 고조되었다.

메이지 신정부 수립 후 일본은 1868년(메이지 원년) 12월 19일, 신정권 수립을 알리고 근대적 국제 관계 수립을 요구하는 국서를 조선에 보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척화 정책 아래 조선 정부는 서구화를 추진하는 메이지 정부를 의심하여 국서 수령을 거부했다. 일본은 여러 차례 국서를 보냈지만, 조선은 계속 거부하여 외교 교착 상태가 시작되었다(조선의 일본 국서 거부).

서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가운데, 일본 신정부 내에서는 조선 외교 권한을 외무성에 일원화하고 대마도 종씨를 제외한 황사를 파견해야 한다는 의견이 강해졌다. 1870년(메이지 3년)에는 사다 하쿠보 등이 조사 목적으로 파견되었으나, 그는 귀국 후 “30개 대대를 가지고 조선을 공격해야 한다”는 정한론 건백서를 제출했다.

이후 외무성은 대마도 종씨를 통한 조선 외교 일원화(1871년(메이지 4년) 2월), 야나기하라 사키미쓰(柳原前光)의 청국 파견(1871년(메이지 4년) 8월) 등 여러 방책을 강구하여 같은 해 9월 13일 청국과 일청수호조규를 체결했다.

그러나 1871년(메이지 4년) 4월 신미양요가 발생하고, 조선이 척화 의지를 강하게 보여 협상은 진전되지 않았다. 1871년(메이지 4년) 말부터는 이와쿠라 사절단이 서구에 파견되어 1873년(메이지 6년) 가을까지 주요 외교 안건은 보류되었다.

1872년(메이지 5년) 5월, 외무성 관리 사가라 마사키(相良正樹)는 협상 부진에 초조함을 느껴 초량왜관을 나와 동래부사와 면담을 요구했다(왜관란출). 같은 해 9월, 초량왜관을 대일본공관으로 개명하고 외무성 직할로 두었다. 이는 조선 정부가 대마도번을 위해 설치한 초량왜관을 일본이 일방적으로 변경한 조치였기에 동래부사는 격분하여 10월에는 대일본공관에 대한 식량 공급과 일본 상인의 무역 활동을 중단시켰다.

1873년(메이지 6년) 5월 31일, 히로쓰 히로노부(広津弘信)의 보고를 받은 일본 정부는 조선 파병을 각의에 부의했다. 이 보고는 일본을 모욕하는 내용의 전령서[10]가 왜관에 게시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육군 수개 대대, 군함 수척” 파견을 통한 출병을 주장했다.[12][13][14](정한론).

2. 2. 조선의 정세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중앙집권화와 근대화를 추진했고, 대외적으로는 정한론을 내세워 부국강병을 추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흥선 대원군이 권력에서 물러난(1873년 11월) 조선을 개항시킬 기회를 엿보았다. 이전부터 조선이 문호개방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일본은 무력시위를 통해 조선을 압박하고자 했다. 1875년 9월, 일본 정부는 군함 운요호 등을 부산항에 정박시켜 함포 시위를 벌이고, 영흥만까지 북상시켜 해로 측량과 무력시위를 감행했다.[1]

19세기 후반, 한국은 러시아 제국과 프랑스 식민 제국 등 여러 강대국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청나라일본 제국도 이러한 경쟁에 가담했다.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도쿠가와 막부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일본 정부가 수립되었다. 일본은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여 새로운 정부 수립을 알리고 근대적 외교 관계 수립을 제안하는 칙서를 보냈다.

그러나 조선은 칙서에 사용된 '皇'(황)과 '勅'(칙)이라는 한자가 중국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권위를 상징한다는 이유로 수령을 거부했다. 이는 일본 천황이 청나라 황제와 동등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청나라는 일본의 힘을 인지하고 조선에 칙서를 받으라고 제안했다.[1] 그러나 1875년 부산에서 열린 협상에서도 조선은 일본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고,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메이지 신정부가 수립된 일본은 1868년(메이지 원년) 12월 19일, 신정권 수립을 통고하고 근대적인 국제 관계 수립을 요구하는 국서를 가진 사절을 조선 정부에 파견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지휘 아래 척화 정책을 펼치던 조선 정부는 서구화를 추진하는 메이지 정부를 의심하여, 국서의 수령을 거부했다. 일본은 여러 차례 국서를 보냈지만, 조선 측은 계속해서 수령을 거부하여 외교적 교착 상태가 시작되었다(조선의 일본 국서 거부).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신정부 내에서는 조선 외교를 외무성에 일원화하고, 대마도 종씨를 제외하고 황사를 파견해야 한다는 의견이 강해졌다. 그 전제로 사다 하쿠보 등이 파견되었지만, 그는 귀국 후 1870년(메이지 3년) “30개 대대를 가지고 조선을 공격해야 한다”는 정한론 건백서를 제출했다.

외무성은 대마도 종씨를 통해 조선 외교의 일원화를 추진하는 종씨 파견 계획(1871년(메이지 4년) 2월)과 류하라 마사미쓰의 청나라 파견(1871년(메이지 4년) 8월 정부 등 대론) 등 여러 방책을 강구하여, 같은 해 9월 13일에는 청나라와 일청수호조규를 체결하게 되었다.

그러나 1871년(메이지 4년) 4월, 신미양요가 발생하여 조선의 척화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일본에 대한 의심도 커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9] 협상은 진전되지 않았고, 1871년(메이지 4년) 말부터는 이와쿠라 사절단이 서구에 파견되어 1873년(메이지 6년) 가을까지 국정·외교에 관한 중요한 안건은 사실상 보류되었다.

1872년(메이지 5년) 5월, 외무성 관리 사라 마사키는 협상이 진전되지 않자 초조함을 느껴 왜관란출 사건을 일으켰다.

같은 해 9월, 초량왜관을 대일본공관으로 개명하고 외무성에 직접 관리하게 했다. 이에 동래부사는 격분하여 10월에는 대일본공관에 대한 식량 등의 공급을 중단하고, 일본 상인의 무역 활동을 중단시켰다.

1873년(메이지 6년)에는 히로쓰 히로노부의 보고를 받고 조선에 대한 사절 파견이 각의에 부의되었다. 이때 정한론이 대두되었다.[10][11][12][13][14]

2. 3. 국제 정세

일본은 메이지 유신(1868년)을 통해 중앙집권화와 근대화를 추진하며 대외적으로 침략전쟁을 모색했다. 1873년 11월, 흥선대원군이 물러나면서 조선을 개항시킬 기회를 잡았다. 이전부터 조선이 문호개방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기에, 일본은 군함 5척을 조선 연해에 파견하여 무력시위를 하기로 결정했다. 1875년 9월, 일본 정부는 군함 운요호 등을 부산항에 정박시켜 함포 시위를 하고, 영흥만에 운요호를 북상시켜 해로측량과 무력시위를 하였다.

19세기 후반, 한국은 러시아 제국과 프랑스 식민 제국 등 여러 제국 열강의 세력 다툼의 장이 되었으며, 청나라일본도 이에 포함되었다.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도쿠가와 막부가 종식되고, 일본은 사신을 조선에 파견하여 새 정부 수립을 알렸다. 그러나 조선은 칙서에 사용된 '皇'(황)과 '勅'(칙)이라는 글자가 중국 황제의 권위를 상징한다는 이유로 수령을 거부했다.[1] 이는 일본 천황이 청나라 황제와 동등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청나라는 일본의 힘을 알고 조선에 칙서 수령을 제안했지만, 1875년 부산에서의 협상도 진전되지 않았다.

메이지 신정부는 1868년 12월 19일, 조선에 근대적 관계 수립을 요구하는 국서를 보냈으나, 흥선대원군의 척화 정책 아래 조선 정부는 국서 수령을 거부했다. 이후 여러 차례 국서를 보냈지만, 조선은 계속 거부하여 외교 교착 상태가 시작되었다(조선의 일본 국서 거부).

서계 문제가 교착되자, 일본 신정부 내에서는 조선 외교를 외무성에 일원화하고 황사를 파견해야 한다는 의견이 강해졌다. 1870년, 사다 하쿠보는 정한론을 주장하는 건백서를 제출했다.

1871년 2월, 외무성은 대마도 종씨를 통해 조선 외교 일원화를 추진하고, 같은 해 9월 13일 청나라와 일청수호조규(日清修好条規)를 체결했다. 그러나 1871년 4월,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발생하고[9] 조선의 척화 의지가 강해 협상은 진전되지 않았다. 1871년 말부터 이와쿠라 사절단이 서구에 파견되어 주요 외교 안건은 1873년 가을까지 보류되었다.

1872년 5월, 외무성 관리 사라 마사키는 협상이 진전되지 않자 초조함을 느껴, 그때까지 출입이 금지되었던 초량왜관(대마도번의 조선 주재 사무소)을 나와 동래부사와 면담을 요구했다(왜관란출(倭館欄出)). 같은 해 9월, 초량왜관을 대일본공관으로 개명하고 외무성이 직접 관리하게 했다. 이에 동래부사는 격분하여 10월, 대일본공관에 대한 식량 공급과 일본 상인의 무역 활동을 중단시켰다.

1873년 5월 31일, 히로쓰 히로노부의 보고를 받고 조선에 대한 사절 파견이 각의에 부의되었다. 이때 왜관의 전령서[10]가 일본을 모욕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출병을 전제로 육군과 군함 파견을 협의할 것을 요구했다(정한론(征韓論)).[11][12][13][14]

3. 발생

9월 20일(음력 8월 21일) 이노우에 요시카 소좌가 지휘하는 운요호는 난지도 부근에 정박하여 식수를 구한다는 구실로 강화도 초지진 포대까지 접근했다. 조선군은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를 하였으나, 운요호는 이를 무시하고 불법 접근을 계속하였다. 이에 초지진 포대에서 포격을 가하자, 운요호는 일단 후퇴했다.

다음날, 운요호는 초지진에 접근하여 전날의 포격에 대해 항의하려 했으나, 다시 포격을 받았다. 일본 측 주장에 따르면, 운요호는 이에 대응하여 초지진에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그러나 이노우에 요시카 함장이 남긴 기록에는 전날 조선군의 포격에 대한 보복 공격을 위해 초지진에 접근하여 운요호가 먼저 발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37]

포의 성능과 포술에서 우세했던 일본군은 초지진을 파괴하고, 영종진에도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육전대를 상륙시켜 살인, 방화, 약탈을 자행했다.[37] 이 과정에서 조선군은 전사자 35명, 포로 16명이 발생했고, 대포 35문, 화승총 130여 정과 많은 군기 등을 약탈당했다. 반면 일본군은 단 2명의 경상자만 발생했다.

운요호(Un'yō)의 병력 상륙, 강화도. 일본 목판화


이 사건은 1866년 프랑스 원정과 1871년 미국 원정에 이어 강화도에서 발생한 외국 군대와의 충돌이었다.

일본 측의 공식 보고서는 3일간의 교전을 하루 만에 발생한 것처럼 서술하고, 지명 오류 등이 있어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24]

최근 발견된 9월 29일자 상신서[24]에 따르면, 운요호가 소형 모터보트로 강화도 방면 샐리강을 거슬러 올라간 목적은 측량 및 여러 사항을 조사하고 조선 관리를 만나 문의하기 위해서였다. 조선 측 관리와 접촉하여 급수를 한 점과 9월 24일에 "오전 물을 汲んだ"는 보고도 있어, 물을 찾거나 청수하기 위해서였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9월 상신서에는 포격 사건 발생까지의 상황이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소형 모터보트로 강화도 진영 근처까지 거슬러 올라가 더 안쪽(한강 방면)으로 나아가려다 포대에서 포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과 조선 정부는 이 사건을 우발적인 것으로 인식했으나, 현대 연구자들은 일본 측의 의도적인 도발 행위였다는 것이 정설이다.[29]

3. 1. 운요호의 도발

9월 20일(음력 8월 21일) 이노우에 요시카 소좌가 지휘하는 운요호는 난지도 부근에 정박하여 식수를 구한다는 구실로 강화도 초지진 포대까지 접근했다. 조선군은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를 하였으나, 운요호는 이를 무시하고 불법 접근을 계속하였다. 이에 초지진 포대에서 포격을 가하자, 운요호는 일단 후퇴했다.

다음날, 운요호는 초지진에 접근하여 전날의 포격에 대해 항의하려 했으나, 다시 포격을 받았다. 일본 측 주장에 따르면, 운요호는 이에 대응하여 초지진에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그러나 이노우에 요시카 함장이 남긴 기록에는 전날 조선군의 포격에 대한 보복 공격을 위해 초지진에 접근하여 운요호가 먼저 발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37]

포의 성능과 포술에서 우세했던 일본군은 초지진을 파괴하고, 영종진에도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육전대를 상륙시켜 살인, 방화, 약탈을 자행했다.[37] 이 과정에서 조선군은 전사자 35명, 포로 16명이 발생했고, 대포 35문, 화승총 130여 정과 많은 군기 등을 약탈당했다. 반면 일본군은 단 2명의 경상자만 발생했다.

최근 발견된 9월 29일자 상신서[24]에 따르면, 운요호가 소형 모터보트로 강화도 방면 샐리강을 거슬러 올라간 목적은 측량 및 여러 사항을 조사하고 조선 관리를 만나 문의하기 위해서였다. 조선 측 관리와 접촉하여 급수를 한 점과 9월 24일에 "오전 물을 汲んだ"는 보고도 있어, 물을 찾거나 청수하기 위해서였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9월 상신서에는 포격 사건 발생까지의 상황이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소형 모터보트로 강화도 진영 근처까지 거슬러 올라가 더 안쪽(한강 방면)으로 나아가려다 포대에서 포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9월 19일부터 24일까지의 전투 상세 (9월 29일자 상소문 기준)[24]

날짜사건 내용
9월 19일오후 4시 32분, 솔리강 어귀 련청도(영종도) 동쪽 끝에서 영종성(제1포대) 확인, 췌월미도 연안에 정박.
9월 20일
9월 21일
9월 22일
9월 23일
9월 24일



당시 일본과 조선 정부는 이 사건을 우발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조약 협상과 사과 요구를 진행했다.[29] 그러나 현대 연구자들은 청나라 군함의 중요 군사 거점 침입이 의도적인 도발 행위였다는 것이 정설이며[30], 조선 측의 포격을 유발하려는 의도와 조직적인 정보 은폐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3. 2. 조선군의 대응과 교전

9월 20일, 운요호는 강화도 초지진 포대 인근에 접근하여 조선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접근을 계속하였다. 이에 초지진 포대에서 포격을 가하자, 운요호 함장 이노우에 요시카는 함선 자체로 응전하기로 결정하였다. 다음날인 9월 21일, 운요호는 초지진에 접근하여 전날의 포격에 대해 항의하려 했으나 다시 포격을 당했다는 일본 측의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노우에 요시카의 기록에 따르면, 실제로는 보복 공격을 위해 운요호가 먼저 발포했다.[37]

일본군은 우세한 화력을 바탕으로 초지진을 파괴하고 영종진에 포격을 가했으며, 육전대를 상륙시켜 살인, 방화, 약탈을 자행했다.[37] 이 과정에서 조선군은 전사자 35명, 포로 16명이 발생했고, 대포 35문, 화승총 130여 정 등 많은 군수품을 약탈당했다. 반면 일본군은 경상자 2명만 발생했을 뿐이었다.

이 사건은 1866년 프랑스 원정과 1871년 미국 원정에 이어 강화도에서 발생한 외국 군대와의 충돌이었다.

일본 측의 공식 보고서는 3일간의 교전을 하루 만에 발생한 것처럼 서술하고, 지명 오류 등이 있어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24]
상세 교전 경과 (9월 29일자 상소문 기준):[24]

날짜주요 사건
9월 19일운요호, 련청도(영종도) 동쪽 끝에 정박.
9월 20일오전 10시: 영종성 위쪽으로 이동.
오후 1시 40분: 단정을 타고 강화도로 접근.
오후 4시 30분: 초지진 포대에서 포격을 받음. 소총으로 응전 후 귀환.
9월 21일오전 10시 42분: 제3포대(초지진)에 포격.
오후 2시 40분: 제2포대에 상륙하여 진지를 불태움.
9월 22일오전 7시 18분: 제1포대(영종성) 포격.
오전 7시 43분: 육전대가 영종성에 상륙, 점령.
오전 9시 7분: 대포 36문 등 노획.



당시 일본과 조선 정부는 이 사건을 우발적인 것으로 인식했으나, 현대 연구자들은 일본 측의 의도적인 도발 행위였다는 것이 정설이다.[29]

4. 전개

이 사건으로 조선 측 사상자는 35명으로 기록되었으며, 일본군 2명이 부상을 입었다. 또한 한국 해군 인원 16명이 일본에 포로로 잡혔고, 많은 무기들도 약탈당했다. 사건 이후, 일본 제국 해군은 그 지역을 봉쇄하고 조선 정부에 공식 사과를 요구했으며, 이는 구로다 사절단 파견과 1876년 2월 27일 강화도 조약 체결로 이어졌다. 이 조약으로 조선은 일본과 외국 무역에 개방되었다.[31]

4. 1. 일본의 외교 공세

1876년(고종 13년) 일본은 운요호 사건에 대한 항의와 개항 요구를 위해 전권대사를 조선에 파견했다. 그해 2월, 일본은 구로다 기요타카를 전권대사로 하는 사절단을 군함 5척과 함께 강화도에 보내 조선 정부에 담판을 요구했다. 조선 정부는 여러 차례 회의를 거친 끝에 국제 정세 변화에 따라 수호조약 체결 협상에 응하기로 결정하고, 전권대신(신헌)을 강화도에 파견하여 2월 27일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다.[23]

일본은 나가사키에서 수리 중이던 군함 카스가(春日)에 부산 주재 일본 영사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를 부산으로 보내 주재 일본인 보호를 명했으나, 부산은 평온했고 조선 측에 개전 의도가 없어 보여 일본 정부는 관망하는 태도를 취했다.

조선 내에서는 일본 선박 공격 소문이 퍼져 부산 초량의 조선인들이 불안해했고, 조선 정부는 일본 측을 달래는 움직임을 보였다.(모리야마의 『조선이사지(朝鮮理事誌)』[31]에 따름).

1876년 1월, 조일 양국 간의 교류, 통상, 부산과 강화의 개항, 도읍과 개항장 사이의 자유 왕래권 확보를 위해 쿠로다 키요타카(黒田清隆)를 특명 전권 대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부전권으로 하는 협상단이 6척의 함선 호위 아래 강화부(江華府)로 파견되었다. 조선 정부는 개화파(開化派) 오경석(呉慶錫)을 협상 전 접견 사절로 파견했다.

2월 11일부터 강화도에서 진행된 조약 협상에서 조일 양국의 강화도 사건에 대한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회담 기록[32]에 따름).

일본 측조선 측



서계 문제에 관해 조선 측은 하치노헤 사건(八戸事件)을 들어 정당성을 주장했지만, 일본 측은 “하치노헤의 허설은 이미 에도 막부 및 대마번(対馬藩)이 부정한 바 있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일본 측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조일수호조규(日朝修好条規)(강화도 조약) 체결과 강화도 사건, 조약 협상 지체(서계 문제)에 대한 사과문[34]을 교환하는 형식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4. 2. 강화도 조약 체결 (1876년)

1876년(고종 13년) 일본은 구로다 기요타카를 전권대사로, 이노우에 가오루를 부전권대사로 하는 협상단을 조선에 파견하여 운요호 포격에 대한 항의와 개항을 요구했다. 이들은 군함 5척을 이끌고 강화도에 도착하여 조선 정부에 담판을 요구했다.[31] 조선 정부는 중신 회담을 거쳐 국제 정세 변화에 따라 수호 조약 체결 교섭에 응하기로 결정하고, 전권대신(판중추부사 신헌)을 강화도에 파견하였다.

1876년 2월 27일(음력 2월 3일) 조선과 일본 양국은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조선은 일본과 외국 무역에 개방되었다.[34]

강화도 조약 체결 과정에서 양측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회담 기록[32]에 따름).

일본 측 주장조선 측 주장



조선 측은 하치노헤 사건을 들어 서계 문제의 정당성을 주장했으나, 일본 측은 "하치노헤의 주장은 이미 에도 막부 및 대마번이 부정한 바 있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일본 측 주장이 받아들여져 일본 측의 영사 재판권이 인정된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가 체결되었고, 강화도 사건과 조약 협상 지체(서계 문제)에 대한 사과문[34]을 교환하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5. 운요호

'''운요호'''(雲揚, 운양)는 원래 조슈번이 영국에서 구매한 배로, 메이지 유신 이후 1871년 5월 일본제국 해군에 편입된 일본제국 해군의 포함(砲艦)이다.

운요호의 그림


운요호는 조슈번(長州藩. 현재의 하기시 야마구치(山口, 산구)번 혹은 하기번(萩藩)이라고도 칭함)의 군함으로 1868년 스코틀랜드애버딘에서 건조되었다. 양현에 모리가의 문장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1871년(메이지 4년) 5월 판적봉환의 일환으로 일본제국에 헌납되었다.

사가의 난과 대만 침공에 종군하였으며 1875년 해군차관의 명령에 따라 함장인 이노우에 요시카 소좌는 조선군 강화도 포대에 대한 도발을 개시하여 강화도 사건이 발발하게 된다.[1] 1886년 (메이지 19년) 10월 31일 기슈오타우라(紀州阿田浦)에 좌초되어 침몰되었다.

항목내용
선체목조 쌍돛대 기범선
배수량245ton
전장35.7m
전폭7.2m
흘수2.3m
주기2기통 왕복동기관 106마력. 1축추진
무장160mm 전장포 1문, 140mm포 1문


6. 논란

운요호 사건은 조선과 일본 양측의 주장이 현재까지도 엇갈리면서, 사건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조선 측 주장의 진위 여부는 핵심 쟁점 중 하나이다.

6. 1. 조선 측 주장의 진위 여부

조선과 일본 양측은 운요호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로 다른 주장을 펼쳤다. (회담 기록[32]에 따름).

'''<일본 측>'''

  • 일본 정부는 사전에 일본 국기를 전달하여 오인을 피하도록 조선 측에 충고했었다.[33] 그런데도 사건이 발생한 것은 '''조선 측의 태만'''이다.
  • 노란 깃발을 게양하고 있었다는 보고는 받아들일 수 없다.
  • 운요호가 일장기(사건 발생 당시는 1개, 공격받은 후 3개)를 게양하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 애초에 조약 협상이 지체되었던 것(서계 문제)은 사건과 마찬가지로 중대한 문제이다.
  • 사건에 대해 조선 측의 '''명확한 사과를 요구한다'''.


'''<조선 측>'''

  • 조선은 일본과 청나라 양국 이외의 배(서양 선박)가 입항하는 경우 무력으로 격퇴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쇄국 정책)
  • 사건과 같은 시기에 조선 국내에서 영국 함대가 입항한다는 소문이 있어 연안 진지는 긴장하고 있었다.
  • 수도와 가까운 강화부는 더욱더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 사건은 '''일본 선박을 서양 선박으로 오인하여 발생한 불행한 사고'''임이 명백하다.
  • 일본 선박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면 '''공격할 리가 없다'''.
  • 사건 당시 일본 선박은 노란 깃발을 게양하고 있었다고 보고받고 있다.

7. 결과 및 영향

운요호 사건으로 조선 측 사상자는 35명, 일본군은 2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국 해군 인원 16명이 일본에 포로로 잡혔고, 많은 무기들도 약탈당했다.[35] 일본 제국 해군은 사건 지역을 봉쇄하고 조선 정부에 공식 사과를 요구했으며, 이는 구로다 사절단 파견과 1876년 2월 27일 강화도 조약 체결로 이어졌다. 이 조약으로 조선은 일본과 외국 무역에 개방되었다.

이 사건은 조선 정부에 큰 충격을 주어 쇄국 정책을 완화하고 개국 세력이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이 쇄국 정책을 완전히 폐기한 것은 1882년 5월 청나라의 중재로 체결된 미국-조선 수호통상조약 이후였다.

조선이 개국하면서 서구 열강은 조선을 더 이상 중국의 속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직접 조선과 조약을 맺고 외교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이에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며 "별약삼론"을 준수하도록 강요했다.[35]

강화도 조약을 둘러싼 개항장 선정과 관세 설정 등의 문제는 일본과 조선 양국 간의 대립을 야기했고, 이는 쇄국 정책을 지지하는 수구파 세력을 자극하여 1882년 임오군란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7. 1. 조선

이 사건으로 조선측 사상자는 35명으로 기록되었으며, 일본군 2명이 부상을 입었다. 또한 한국 해군 인원 16명이 일본에 포로로 잡혔고, 많은 무기들도 약탈당했다.[35] 이 사건은 조선 정부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쇄국·양이 세력의 반대를 잠재우고 개국 세력이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건 이후 조선은 서서히 개국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이 쇄국 정책을 폐기한 것은 1882년 5월 청나라의 중재로 체결된 미국-조선 수호통상조약 이후였다.

사건 결과, 조선이 개국하게 되자 서구 열강은 조선을 중국의 속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직접 조선과 밀약이나 조약을 맺고 외교 관계를 맺는 국가가 나타났다. 이에 청나라는 조선 관리를 더욱 강화하여 조선의 제삼국에 대한 공사 파견은 허용했지만, "전권"이라는 두 글자는 사용을 금지하고 "별약삼론"을 준수하도록 강요했다.[35]

내용
조선 공사는 주재국에 부임하면 반드시 청나라 공사관에 사전 보고하고, 청나라 공사를 거쳐 상대국과 협상할 것
공사 외무 자리에서 한국 공사는 반드시 청나라 공사의 다음 자리에 앉을 것
중요 협상이 있을 때는 청나라에 사전 보고하고, 상대국과 관계없이 속국 체제를 지킬 것



또한 강화도 조약을 둘러싸고 일본과 조선 양국은 개항장 선정과 관세 설정 등의 문제로 대립하게 되었고, 이러한 대립이 쇄국 양이를 주장하는 수구파 세력을 자극하여 1882년 7월 임오군란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7. 2. 일본

이 사건으로 일본군 2명이 부상을 입었다.[35] 일본 제국 해군은 그 지역을 봉쇄하고 조선 정부에 공식 사과를 요구했으며, 이는 구로다 사절단 파견과 1876년 2월 27일 강화도 조약 체결로 마무리되었고, 이 조약으로 한반도가 일본과 외국 무역에 개방되었다.

7. 3. 국제 관계

이 사건으로 조선측 사상자는 35명으로 기록되었으며, 일본군 2명이 부상을 입었다. 또한 한국 해군 인원 16명이 일본에 포로로 잡혔다. 많은 무기들도 약탈당했다. 사건 이후, 일본 제국 해군은 그 지역을 봉쇄하고 조선 정부에 공식 사과를 요구했으며, 이는 구로다 사절단 파견과 1876년 2월 27일 강화도 조약 체결로 마무리되었고, 이 조약으로 한반도가 일본과 외국 무역에 개방되었다.[35]

사건 결과, 조선이 개국하게 되자 서구 열강도 조선을 중국의 속국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게 되었고, 직접 조선과 밀약이나 조약을 맺고 외교 관계를 맺는 국가가 나타났다. 따라서 청나라는 조선 관리를 더욱 강화하여 조선의 제삼국에 대한 공사 파견은 허용했지만, "전권"이라는 두 글자는 사용을 금지하고 "별약삼론"이라는 것을 준수하도록 조선에 강요했다.[35]

  • 조선 공사는 주재국에 부임하면 반드시 청나라 공사관에 사전 보고하고, 청나라 공사를 거쳐 상대국과 협상할 것
  • 공사 외무 자리에서 한국 공사는 반드시 청나라 공사의 다음 자리에 앉을 것
  • 중요 협상이 있을 때는 청나라에 사전 보고하고, 상대국과 관계없이 속국 체제를 지킬 것


또한 강화도 조약을 둘러싸고 일본과 조선 양국은 개항장 선정과 관세 설정 등의 문제로 대립하게 되었고, 이러한 대립이 쇄국 양이를 주장하는 수구파 세력을 자극하여 1882년 7월 발생한 임오군란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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